라이프로그


연구분야와 연구방식 miscellany

오늘도 무려 한 시간 반의 미팅을 지도교수와 해치웠다.  지난주 월요일에 안선생 돌아오고설랑은 1주일만에 4번째 미팅이니까, 지난 1주일은 거의 무슨 폭풍이 지나간 듯 하다.  밥 해먹을 여유는 사치고, 정상적인 두뇌 활동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인 하루 8시간 잠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거의 집안일은 손을 놨다.  청소며, 빨래며, 아 드러..

초딩도 아닌데 대체 무슨 지도교수 미팅을 글케 자주 하냐면, 일단 아이디어를 들고가면 난 선생 앞에 두고 칠판에 줄줄 써가면서 뭔 소린지 설명을 한다.  중간중간 선생이 껴들면서 토론을 하게 되거나, 너무 바보같으면 일방적으로 깨빡이 나거나, 그런다.  그리고 마지막엔 다음에 뭘 할지 지시한다.  공부할게 더 있으면 뭘 어떻게 더 봐라 알려주고, 아이디어를 전개해야하면 어떤 방향으로 전개해라 지시하고, 이런 식이다.  그러니까, 아주 오래 전부터, 중세시대에 대학이라는 연구기관이 생겨난 이후로 계속 이어져오는 문답식 교육의 전형이라고 보면 된다.  이런 방식의 장점은, 수업처럼 일방적으로 지식을 전달만 하는게 아니라, 문제를 놓고 맞다 틀리다 논리적인 토론을 하는 과정에서 단편적인 지식이 아니라 보편적인 지식을 생산하는 방식을 체득하게 된다는거다.  단점이라면, 토론하는 사람의 수준이 같아야 생산적이기 때문에 매번 선생 눈높이에 맞추기 위해서는 한 시간 미팅을 위해 최소 5시간 이상 공부를 해야 하니까 지도받는 사람으로서는 따라가기 힘들다는 점과, 이게 그야말로 time consuming supervison (as an old professor said)이기 때문에 지도하는 사람으로서는 피곤하다는 점.  연구하고 있는 분야가 마이너인데 하드코어라 미치지 않고서야 인기도 있고 말랑한 macro나 econometrics를 놔두고 네트워크 하겠다는 사람들이 많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  경제학에서 네트워크 연구하고 있는 사람들 대부분 좀 미쳤다.  다른 말로 넷덕후 ㅡㅡ;), 함께 토론이 가능한 사람이 많지 않다는 이유로 안선생은 이 time consuming supervison 스타일을 지금껏 유지하고 있다.  공부를 단순히 지식 습득 수준을 넘어서 생산해야 하는 단계에서는 토론이란게 얼마나 중요한 연구의 과정인지를 생각해 보면, 쥐뿔도 없는 학생이지만 그래도 네트워크에 미쳤다는 공통점 만으로도 토론 상대로 대해주는 것 같다.  (솔직히 지가 어디가서 나처럼 네트워크 하겠다고 제발로 걸어오는 학생을 찾겠어..

진 빠지는 미팅 후, 한숨 돌리려고 밖에 나왔는데 친구를 만났다.  이 친구도 오늘 지도교수와 미팅 있었다고.  근데 이 친구는 지도교수와의 미팅이 30분을 넘어가지 않는다.  그리고 대부분의 작은 이슈들은 이메일로 다 오고가고, 지도교수랑 직접 만나서는 딱 필요한 얘기들만 간단하게 하고 끝낸다는거다.  그의 지도교수는 제법 이름이 알려진 유명한 사람인데, 이름값이 허투루 생기지는 않는다고, 늘 지도교수는 필요한 지시를 필요한 만큼만 효율적이고도 효과적으로 하기 때문에, 딱 지도교수가 시키는대로만 하다보면 어느새 논문은 완성.  이 친구는 연구 주제에 대해 지도교수와 토론을 한다거나 지도교수의 의견에 반대의견을 제시한다던가 하는 일은 없다.  지도교수가 워낙 훌륭한 분이라 그럴 수도 있지만, 굳이 그럴 이유가 없는게, 많은 사람들이 연구를 해오고 있는 분야에서는 그 분야 안에서 이미 정립된 연구방법이 존재하고, 이를 충분히 잘 알고 있는 지도교수라면 학생으로서는 그저 지시대로만 따라가면서 박사과정에 있는 동안 그 분야의 사고방식을 배우기만 하면 되는거다.  그래서 메이저 분야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시행착오도 적고 거의 매뉴얼화된 연구체계를 마치 수업을 듣고 지식을 습득하는 것처럼 익숙해지기만 하면 박사과정 끝나는거다.  효율적이며 효과적으로...  그리고 얘는 나보다 아마 빨리 박사학위를 받을 것 같다. ㅡㅜ  시작은 같이 했는데..  :(

uncovered field에서는 정해진 길이 없다.  'uncovered/unexplored'인데 그게 길인지 아닌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그렇다보니 토론을 벌이고 세미나를 들어가고 하는 일련의 활동들이 연구를 계속하는데 매우 중요하게 작용하는거다.  삽질도 많이 하는 편이고, 또 그런 삽질이 항상 뭔가 결과로 이어지는 것도 아니지만, 아마 친구처럼 지도교수가 과제를 주고 그냥 따라가기만 했더라면 삽질이 더 심했을것 같다.  그래도 불안한건, 이렇게 맨날 삽질만 하다 대체 학위는 언제쯤... (멍~)  정말 미치지 않고서야..  미친게지..  미친게야..  미치지 않고서야 이렇게 불투명한 분야를 계속 또 하겠다고 분기탱천할 수는 없지..  근데, 아무리 네트워크에 미쳤다고는 해도, 벌써 마지막 챕터 주제를 고민하고 있는 친구를 보니 배아프고 샘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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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다시다 2009/09/15 10:50 # 삭제 답글

    중세부터 이어져오는 문답식 교수방법이라니, 완전 로망인데요. 꼭 돌로 만든 방 안에서 라틴어로 할 것 같아요.
  • 너구리 2009/09/15 19:27 #

    21세기형, 카페에서 커피 마시면서 연습장 펼쳐놓고 영어로 하기도 합니다. :)
  • Seldon 2009/09/15 10:54 # 삭제 답글

    그만큼 확실하게 배우고 익히시겠군요.
  • 너구리 2009/09/15 19:28 #

    배우는건 많은데 그만큼 선생님도 저도 양쪽 다 힘든 방식이에요. 진짜 time & energy consuming..
  • 漁夫 2009/09/15 12:54 # 답글

    답이 없는 분야에서는 '논문에서도 답이 없는' 수가 많다는 것은 학계의 진리죠.
  • 너구리 2009/09/15 19:31 #

    답 없는 논문 안되게 하려다보니.. 시간과 노력은 들어가도 결과가 없다는게.. 박사과정에서 답 없는 분야를 선택한게 제 실수죠.
  • 후유소요 2009/09/16 10:00 # 답글

    언젠가 파이오니어가 되실 거에요 (!) 그래도 지도교수님이 풀케어 해주시는 건 찾기 어려운 행운 같아요..^^ 잘나가는 분야의 '대가' 밑에 들어갔는데 미아가 돼서 고생한 친구를 하나 알고 있어서 ;ㅅ;
  • 너구리 2009/09/16 18:15 #

    제 지도교수님은 마이너분야의 주니어 교수, ㅡㅡ; 게다가 학생이라곤 달랑 저 하나 뿐이라서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는게 가능한데, 메이저 분야의 유명한 교수들은 애당초 지도학생도 많고 부르는 데도 많아서 저희 선생님처럼 학생 한 명에게 일주일에 다섯시간 이상씩 투자하는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죠. 그만큼 잘나가는 분야의 대가 밑에 학생들은 방치될 가능성도 높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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